프랑스 혁명, 카톨릭 교회와 교황권의 몰락

프랑스 혁명은 갑자기 왜 시작되었나?

신분제도

18세기 말, 유럽은 전통과 종교에 맞서 인권을 옹호하는 계몽주의라고 불리는 심오한 지식과 문화 변동을 맞이한다. 중산층과 인쇄물의 등장은 정치적인 계몽을 일으켰다. 미국 독립전쟁은 기존의 영국 식민지들을 독립국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유럽 국가 중에 가장 크고, 부유한 프랑스는 여전히 ‘에스테이트’라는 세 가지 엄격한 신분 계층으로 구분된 사회를 유지하며 지내고 있었다.

Troisordres
“이 순간이 빨리 끝나기만을… ” 성직자와 귀족을 부양하는 3계층의 현실을 풍자한 그림
  • 제1계층 : 성직자(주교와 제사장들)
  • 제2계층 : 귀족
  • 제3계층 : 서민

루이 16세는 그의 통치 기반을 1,2계층 – 성직자와 귀족 – 에게 권한을 주는 방식으로 유지했다. 제 3계층, 중산층과 기술자 계층 2천만 서민들은 소외되고 힘도 없이 그저 왕이나 다른 계층에게 세금이나 내는 존재였다. 흉년이 든 때에도, 제 3 계층은 세금만 내고 그저 손가락만 빠는 상황이었다. 반면 1,2 계층은 부유하고, 넉넉하며, 사치스러운 삶을 계속 유지했다.

Louis xvi
대관식 복장의 루이 16세

 

프랑스 국가 부채

그럭저럭 잘 지내던 프랑스는 미국 독립전쟁 지원과 영국과의 장기 전쟁으로 인해 빚의 수렁에 빠지고 만다. 비용이 많이 드는 이 전쟁들은 프랑스에게 거액의 빚을 안겨주었고, 그 결과 국왕은 국가 예산을 올리고 세금을 더 징수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1,2 계층은 세금을 면제 받기 때문에 3계층인 서민 계층에게는 더욱 큰 부담이 작용하고 있었다. 이런 고착된 상황은 그들에게 분노를 촉발하였고, 천부적 인권에 대한 생각을 싹트게 하였다. ‘과연 누가 이런 상황을 우리에게 만들었는가?’ ‘그들은 누구인가?’ ‘누가 그들에게 이런 권리를 주었는가?’ 이런 질문들은 전 국가를 프랑스 혁명이라는 격변 속으로 몰아갔던 것이다.

카톨릭 교회와 돈

카톨릭은 프랑스 전체의 6%의 영토를 소유하고 있었고, 학교와 병원, 대수도원, 수도원 영지 등 많은 부분을 관장하고 있었다. 더구나, 교회는 세금과 별도로 농산물의 10%를 십일조로 거두었다. 카톨릭 교회의 부정축재는 많은 사람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빵 위기

경제적 위기가 증폭될수록, 가난한 사람들의 부담은 더욱 가중되었다. 그들의 가난과 변덕스러운 날씨는 수확량을 감소시켰다. 1788년 프랑스 사람에게는 빵이라는 단어는 생명 그 자체를 의미하게 되었다. 보통의 프랑스 사람들은 2 파운드의 빵을 매일 먹는데, 그들의 주식이기 때문에 빵의 가격 변동은 사람들의 피부에 직접적으로 와 닿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가격이 두 배가 된다면, 서민들은 큰 문제에 직면하는 것이다. 루이 16세의 경제 정책 실패로 인해서 빵값이 폭등하였다. 판매자들은  최대한 이익을 위해 가격이 폭등 할때까지 빵을 팔지 않고 쌓아두었고, 결국 한 덩이의 빵이 한달치 월급에 육박하게 되었다.

Ebcosette
레미제라블의 코제트. 프랑스 혁명 당시 서민들의 삶을 잘 그린 작품이다.

 

프랑스 혁명 발발(1789-1794)

분노한 파리 시민들은 공분한 군인들과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다. 바스티유는 왕의 정책에 반대하는 정치범을 수용하는 정치의 상징이자 무기의 저장소였다. 혁명이 전 국토로 번지고, 봉건 영주제도는 폐지되었다. 혁명가들은 천부 인권을 부르짖었다.

프랑스 혁명의 정점은 1793년 11월 10일이었다. 이것은 부정한 통치자에 대한 봉기이기도 했고, 카톨릭 교회의 권위에 대한 혁명이기도 했다.

Anonymous - Prise de la Bastille
1789년 7월 14일 성난 민중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함.

카톨릭 제사장과 수녀들은 혁명가들의 표적이 되었다. 혁명가들은 노트르담 성당의 많은 부분들을 파괴하였다. 거리를 떠돌던 매춘부는 이 성의 여신으로 떠받들어졌다. 카톨릭 교회을 조롱하고 모욕하기 위함이였다고 하니 당시 파리 시민이 느꼈던 카톨릭에 대한 분노를 짐작할수 있다. 프랑스 성직자들은 교황과의 관계를 끊기를 강요 당했고, 교회 예배도 중단해야만 했다. 그리고, 1798년도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다.

교황권의 몰락

프랑스 혁명군은 로마로 진군했고, 교황의 방위선을 뚫고 피우스 6세를 향해 진군한다. 1798년 2월 10일, 나폴레옹 군대 소속 젊은 버티어 장군은 이탈리아 곳곳에서 승리를 거뒀고, 피우스 6세를 생포했다. 이것으로 교황의 모든 권위는 완전히 끝나고 말았다. 천년이 넘는 시간동안 교황은 모든 세속의 권위를 뛰어넘는 최고의 권력자 였다. 교황의 엄청난 권세는 종교가 어떻게 정치, 사회, 경제 전반을 지배하는지 보여주었다. 실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막강한 힘을 가진 교황 이였지만, 일개 장군의 의해 사로잡혔다는 것은 교황권의 몰락을 보여주는 것이였다. 이미 늙고 연약한 교황 피우스 6세는 자신이 갇혔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게 되었고, 곧 병이 나게 되었다. 1년을 버틴 그는 프랑스의 작은 마을 발랑스로 끌려갔고, 도착 후 6개월 만인 1799년 8월 29일 한때 양의 우리로 쓰였던 버려진 건물에서 숨을 거둔다. 그의 시체 처리도 비참하게 되었는데, 1800년도 봄까지 알코올에 방부 처리를 하여 보관되다가, 1802년에 이르러서야 로마로 이장 된다. 하늘의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교황권의 처참한 몰락을 보여준다.

Morte di S. S. Pio VI
피우스 6세의 죽음

유럽에서 교황의 권위가 완전히 끊어지고, 카톨릭 교회의 서유럽 지배는 끝난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1929년, 이탈리아 무솔리니는 피우스 11세와 라테라노 조약을 체결하였는데, 이것을 통해서 교황의 나라는 바티칸시에서 부활한다.

암흑세기는 이제 다 지나갔다. 16세기에 종교 개혁자들은 가톨릭 교회의 오류를 지적했고, 종교의 자유와 개혁은 부르짖었다. 하지만, 현재 많은 개신교들은 가톨릭 교회의 종교 관례를 답습하고 있는 것이 지금 현실이다.

아직 종교 개혁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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