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르네상스는 재생, 부활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15세기와 16세기에 유럽의 많은 학자와 예술가들이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 철학, 예술, 과학을 이상으로 하여 이것들을 부흥시키고, 새 문화를 창출해낸 운동으로, 그 운동의 중심지는 이탈리아 였다.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라파엘로의 아테네학당, 미켈란젤로가 무려 4년동안 천장에 메달려 작업을 했다는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 등은 르네상스 시대가 후손에게 남긴 위대한 걸작품이다. 각각의 다양한 특색의 문화 형성은 유럽 전체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고, 근대 유럽 문화 태동의 기반이 되었는데, 역사의 아이러니중 하나는 스페인의 이슬람들이 유럽 르네상스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유럽 르네상스 와 스페인 이슬람
천년(AD 1,000)이 되기까지, 서유럽은 당시 두 개의 뛰어난 문화였던 이슬람과 비잔티움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원시사회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스페인은 달랐다. 이슬람 지배를 받는 동안 스페인은 크게 번영했고 ‘무어드’라고 불리는 이슬람 학자들은 수학, 천문학, 식물학, 역사, 철학과 같은 고대 그리스 문화를 잘 보존하고 있었다. 세련된 고대 그리스 문화는 이슬람 중심지였던 스페인으로 여행 온 주변 유럽 국가의 수도사들과 기독교인들에 의해 재발견 되고, 유럽 전역으로 전파 되었다. 이슬람 학자를 통해 재 발견된 고대 그리스 철학자중 한명은 아리스토텔레스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은 유럽인들이 내면에서의 묵상에서 주변세계의 외적인 관찰로 초점을 전환 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고, 당시 생겨나긴 시작한 과학에 대해 많은 의미를 부여하게 하였는데, 그 중에 자연과학이 크게 발전할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가져왔다.

메디컬 르네상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 등 과학자들의 노력으로, 오랫동안 종교적인 영향으로 금지되었던 해부학이 크게 발전할수 있었다. 해부학이 발전하면서 외과도 과학으로 인정 받을 수 있었으며, 최초로 화학과 의학을 결합시킨 파라켈소스의 노력은, 현대 의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르네상스 시대의 과학기술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아이작 뉴턴이 있기 전까지, 모든 사람들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 생각 했으며, 지구는 고정되어 있으며, 고정된 지구 주위를 태양이 돌고 있다고 확신 했었다. 안톤 반 레벤후크가 현미경을 최초로 발견하기 전까지는, 누구도 박테리아 세계를 알지 못했다. 윌리엄 하비 이전까진, 누구도 혈액이 우리 몸안에서 어떻게 순환하는지 알지 못했다. 당시, 기독교적 가치라는 명분하에 카톨릭 교회와 국가는 과학 발전을 억제하기 위해 종종 함께 협력했다. 이에,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같은 유명한 과학자는 고문과 죽음의 위협에 대한 협박으로 자신의 과학적 가치를 포기해야만 했다. 15세기 중반 독일의 한 작은 마을에선 인간 역사를 바꾸는 혁신적인 기술이 등장했다. 요하네스 구텐베르크는 근대 활판인쇄술을 발명하고 많은 책들을 인쇄하고 보급하였는데, 처음 그가 인쇄한 책 중에는 성경도 있었고, 이것은 결론적으로 프로테스탄트들의 종교개혁을 촉진하는 역할을 했다.

어떻게 두 가지 혁명-기술혁명과 종교개혁-이 역사에 얽혔을까?
1526년 영국의 윌리엄 틴들은 최초로 신약성경을 간결한 영어로 번역을 했고, 이제 사람들은 누구나 성경을 쉽게 읽을 수 있게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문명의 발전은 모두에게 환영받지 않았다. 그 때까지만 해도 성경은 라틴어로만 존재하였다. 따라서, 성경을 읽는 것은 특수한 교육을 받은 성직자들의 특권이였다. 성경이 각각의 언어로 번역되고, 사람들이 쉽게 성경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로마 교회의 지식 독점의 종말을 의미한 것이다. 이는 교회에 위협으로 다가왔다. 결국, 최초 영어 신약 성경을 번역한 틴들은 이단이란 죄명 하에 나무에 걸려 화형 당했다. 그러나, 이미 변화의 바람은 불고 있었다. 종교개혁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천주교 모순에 대항하여 일어나기 시작했고, 이것은 곧 천주교의 직접적인 위협으로 다가왔다.

종교개혁 이전의 상황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는 물질주의가 만연했고, 교회에 재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있었던 귀족들과 부자들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또한 한 사람이 여러 개의 다양한 직책을 가질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성직자 이면서, 동시에 은행원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교회 직책에 대해 소흘하여도 용서가 되었다. 성직자로서의 사명과 책임 또한 무시되었다. 또한, 당시 마인츠 대주교는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비를 지원하기 위해 면죄부 판매를 적극 장려했다. 면죄부는 일종의 돈으로 사는 구원이었다.
마틴루터 종교개혁 (1483 ~ 1546)
독일에서 또 다른 사람이 이번엔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하고 있었다. 신학자 마르틴 루터 (Martin Luther)였다. 1517 년 10 월 31 일, 루터는 카톨릭 교회에 대한 비위를 지적하는 ‘95개조 반박문’을 썼고, 이 항의 시위서를 비텐 베르크 성당의 정문 벽에 붙여 발표 하였다.

이 작은 행동이 16세기 종교개혁의 시작 이였고, 프로테스탄트 라고 불리는 급진적인 새로운 분파를 일으켰다. 루터는 카톨릭 교회에 대해 자세히 관찰하면 할수록 너무 많은 부패와 모순, 오류를 발견했다. 루터는 1517 년부터 교회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일련의 책들을 출판했고, 마침내 로마 교황을 ‘적 그리스도’라고 불렀다.
놀라울 것도 없다. 루터는 파문됐다. 그러나 개혁은 필연적으로 시작되었고, 1530년까지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은 서유럽 전역을 휩쓸고 있었다. 하루 아침에 수십만 사람들이 로마 카톨릭과의 인연을 끊고, 루터의 종교 개혁을 지지했다. 이후 칼뱅 같은 개혁파들이 루터의 개혁을 계승했다.
사람들은 왜 루터의 종교 개혁에 열광했을까?
루터의 사상은 당시 시대적 분위기와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 로마 천주교는 많은 평범한 기독교인들에게 무관심한 듯 보였고, 평범한 기독교인들에게 로마 천주교는 부패한 권력집단으로 보였다. 또한, 당시는 근대 사회가 형성되는 시기였고, 역사상 전례 없는 서구 문명이 형성되는 태동기였다. 구텐베르그의 혁신적인 인쇄술의 보급은 종교개혁과 과학혁명을 촉진 하였고, 르네상스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은 새로운 지식을 쌓으며, 그들이 믿고 가치를 두었던 전통적인 사고에 의문을 갖기 시작한 때였다. 또한, 16세기 초 급격한 사회변화 속에서, 평범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힘이 매우 미약하다고 느꼈을 때, 오직 자신의 신앙과 성경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수 있다는 루터의 주장은, 그들의 삶에 활력소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상은 서방 세계에서 가장 강한 이념 중 하나인 ‘개인주의’의 등장을 의미했다.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이 카톨릭 교회의 권력에 대항하면서 일어났을때, 신흥 국가의 통치자들 또한 새로운 종교개혁자들과 동맹을 맺고, 교황에 권력에 맞서 대항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로마교회와 국가 사이에 특별한 투쟁은 영국의 헨리왕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할수 있다.
영국국교 ‘성공회’ 탄생 비화
헨리8세 vs 교황 클레멘스 7세
헨리는 아라곤 출신의 캐서린과 결혼 하였고, 둘 사이에 딸을 낳았다. 자신의 왕위를 물려줄 아들을 간절히 원했던 헨리는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또 다른 여인 앤 불린과 비밀리에 결혼을 한다. 태어날 아이를 사생아를 만들지 않고, 합법적으로 자신의 후계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첫 번째 아내인 캐서린과 이혼을 해야만 했다. 이는 카톨릭 교회의 법에 위배되는 행위였다. 헨리는 자신의 이혼을 교황에게 간절히 호소했다. 하지만 교황은 그의 요청을 거부하였고, 그와 앤 불린의 비밀결혼도 인정하지 않았다.
헨리왕도 물러서지 않았다. 왕은 교황이 임명한 켄터베리 대주교를 파면하고, 자신이 직접 대주교를 임명했다. 헨리에 의해 임명된 새로운 대주교는 즉시 그의 첫 번째 결혼은 무효이며, 엔 불린과의 결혼을 인정한다고 선언했다. 이에 교황 클레멘스 7세는 헨리를 파문했다. 그러나 왕은 또 다시 맞섰다. 헨리왕은 로마교회와의 완전한 결별을 선언했고, 영국의 모든 교회를 자신의 권한아래 두었다. 이것이 바로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의 시작이다. 하지만, 엔 불린은 아들을 낳지 못했고, 그녀 또한 11개월후 참수 당한다. 그 후로도 헨리는 아들 후계자를 꿈꾸며, 몇 번의 결혼을 더 했지만, 그는 죽을 때 까지 아들을 얻을 수 없었다. 결국, 그와 엔불린과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그의 왕위를 계승 받게 되는데, 그녀가 바로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이다.

비록 마틴루터가 종교개혁을 했다고 해도 그것은 믿음에 대한 개혁일 뿐 진리에 대한 개혁은 아니었습니다. 2000년전 예수님께서 세워주셨던 새언약의 절기와 안식일이 로마 카톨릭에 의해 모두 훼파되고 사라졌으나 마틴 루터는 새언약의 진리를 찾지 못했고 로마 카톨릭에 의해 만들어진 태양신 숭배 사상인 일요일 예배와 크리스마스를 그대로 지켰기 때문입니다.
오직 진리는 하나님께서만 되찾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마지막 종교개혁은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진리교회에서 이루어 집니다.
2000년전 예수님께서 세워주시고 사도들이 다녔던 진리교회, 하나님의 교회에서 반드시 마지막 예언이 이루어집니다.
종교개혁으로 믿음의 개혁을 외친 일은 대단했습니다.
하지만 믿음만을 강조하며 정작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진리를 회복하지는 못했습니다.
이 시대 하나님의 교회는 진리의 개혁을 일으킨 유일한 교회입니다.
초대교회 베드로,바울이 지킨 안식일,유월절,수건규례,초막절,오순절 등을 지켜야 합니다.
예수님 승천 이후 로마 카톨릭에 의해 세워진 일요일 예배와 크리스마스는 성경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