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럽, 기독교 제국이 되다

서기 312년, 서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콘스탄티누스 1세)은 마침내 로마 전체를 정복한다. 로마 황제는 그리스도 교회를 자신의 권위 아래 두기 위해 교회에 입교하였다.
콘스탄티누스는 폐허가 된 고대 도시 비잔티움(Byzantium)에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이라는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제국의 수도를 만들었다. 로마 제국에서 새로 채택된 기독교 신앙은 동쪽 그리스어, 서쪽 라틴어의 두 언어로 분리되어 존재했다. 4~5세기경, 게르만족은 대 이동하여 서 유럽 전체로 퍼졌고, 엄청난 조직력을 자랑하던 로마 군대는 거의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결국 서로마 제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유럽은 혼돈의 도가니였다. 동쪽에선 마자르인(오늘날 헝가리 출신의 야만족)들이 침입했다. 북쪽에선 금박의 용의 꼬리 모양의 해적선을 탄 바이킹들이 파죽지세로 몰려오면서 마을을 파괴시키고 약탈을 일삼았다. 당시 유럽은 강력한 국가가 없었기에 귀족들 간의 계속된 전투로 유럽 전역이 몸살을 앓고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하나의 새로운 권력이 등장한다. 바로 교황이다. 이제 유럽 전역에 잔인하고 긴 어둠의 시대가 도래 한다.
절대 권력자 교황
카노사의 굴욕

서기 1077년, 1월의 엄동설한에 이태리 북부 카노사에 있는 눈 덮힌 성 바깥에서 한 남자가 3일 동안 맨발로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얋은 모직으로 된 튜닉만 걸친채 죄인이 되어 교황에게 용서를 구하던 이 남자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 였다.
당시 최고의 권력자였던 두 사람. 교황과 황제는 누가 서임권(주교를 임명 할 권리)이 있는지에 대한 한판 승부를 벌였고, 황제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교황 그레고리 7세는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였다. 폐위될 위협에 처한 황제는 눈 덮힌 교황의 성 밖에서 3일 동안 무릎을 꿇는 굴욕적인 사면으로 다시 그의 보좌로 돌아갈 수 있었다(카노사의 굴욕). 이 기이한 사건은 당시 교황의 권세가 모든 국가권력보다 우위에 있었고, 하늘 아래 누구도 교황을 대적할 수 없는 절대적인 교황권의 힘을 보여주는 하나의 역사 속 상징이 되었다.
십자군 (1095–1291)
1095년. 당시 유럽은 영주간의 끊임없는 전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새로운 교황 우르바노 2세는 하나의 해결책을 제시 했다. 바로 유럽에서 계속 되는 내란을 종식하고, 기독교의 명분을 위해 싸우자는 것이였다. 이슬람 통치하에 있던 기독교의 상징인 예루살렘을 되찾자는 그의 말에 유럽인들은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즉시 귀족들과 평민들은 전쟁을 위해 모이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십자군 역사의 시작이다.

첫 번째 십자군(군중 십자군)
1096 년 봄, 평민으로 구성된 총 5만 명의 군대가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관문인 콘스탄티노플을 향하여 행군을 시작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로 가는 도중에 비극이 일어났다. 그들 중 적지 않은 무리가 반유대주의자들이였고, 수천명의 유대인들이 십자군에 의해 학살 당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별다른 준비 없이 원정에 나선 십자군들은 식량과 군수품 조달이 불가능해지자 가는 곳마다 약탈을 일삼았다. 십자군들은 공포와 증오의 대상으로 변했고, 그들의 군대 중 일부는 성난 마을 사람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살아남은 나머지 군대는 유럽을 건너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지만 그들은 곧 터키군에 의해 학살당했다. 최초의 십자군은 참담하게 실패했다. 교황은 즉시 십자군과의 연관을 부인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십자군

3년 후인 1099년 7월 두번째 기사단으로 구성된 십자군이 드디어 예루살렘으로 입성했다. 예루살렘에 도착하자마자 처참한 대학살이 시작되었다. 한 십자군은 당시 참혹한 학살을 이렇게 기록했다. “적군들의 머리를 닥치는대로 잘랐는데 이건 정말 자비로운 행동이였다. 도시는 온갖 고문과 산채로 화형을 당하는 적군들의 고통스런 울부짖음으로 떠나갈 듯 했으며, 잘려진 머리, 손, 발 더미와 죽은 사람들의 핏물로 거리가 가득 차 말을 탄 기사의 무릎까지 차 올랐고, 그들의 말 고삐도 피범벅이 된 채 달려야만 했다.”
1202년, 예루살렘은 무슬림들에게 다시 지배당했다. 무슬림의 지배로부터 예루살렘을 다시 찾고 싶어 하던 교황 이노첸시오 3세는 또 다른 십자군 운동을 촉구했지만, 이미 백년 이라는 긴 시간동안 계속되는 전쟁에 유럽인들은 지칠대로 지쳐있었고, 너무나 적은 기사단만 호응했다.

십자군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불명예스러운 이야기로써, 기독교에 대한 증오와 적대감을 남겼지만, 동시에 유럽 번영의 기틀을 닦은것도 부인할 수 없다. 처음으로 유럽인들은 십자군으로 한 마음이 되었고, 유럽인의 정체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것을 계기로 결국 유럽이 세계의 주요 권력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아랍의 찬란한 문화유산과 비잔티움 제국의 경제적 부를 약탈하여 무역의 새로운 시스템을 확립할수 있었다. 따라서, 로마 카톨릭은 많은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우뚝솟은 철탑과 날개를 펴고 하늘로 나는 듯한 모습의 이탈리아 두오모의 시에나 , 베니스의 산 마르코, 프랑스 파리의 노틀담,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등 장엄하고 웅장한 대 성당들은 모두 이 시기에 지어졌다.
종교재판
‘이단’ – 악마의 이미지를 떠오르게 하는 무시무시한 단어이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 교회에 강력히 반대하고, 검소하고 가난한 삶을 선택한 사람들이 이단으로 낙인이 찍혔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이단을 뿌리 뽑기로 결심했다. 교황 위원회 소속 군대는 즉각 이단을 찾아 나섰으며, 발견하는 즉시 파괴했다. 프랑스에서 시작된 이 캠페인은 결국 프랑스인이 프랑스인을, 기독교인이 기독교인을 맞서 싸우는 동족간의 피의 혈투가 되었다. 선택은 오직 두가지였다. 자신의 신념을 버리던지, 아니면 죽던지… 1231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좀 더 확실하게 이단을 뿌리 뽑을 방법으로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냈다. 그것이 바로 인류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종교재판소다. 그리고, 그것은 기독교인들에게 닥친 가장 끔찍하고, 잔인한 공포의 나날이였다.

악명 높은 스페인 종교재판
한때는 스페인이 서 유럽에서 가장 관대한 나라였던 적이 있었다. 기독교인, 무슬림, 유대인들이 함께 공존하며 살고, 서로 간에 결혼도 굉장히 자유로워 결혼을 했어도 상대방의 종교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스페인은 이슬람 공동체가 남아있던 유일한 서 유럽국가 이기도 했다. 하지만, 상황은 급격히 변했다. 여왕 이사벨라는 하나 된 스페인을 원했고, 이를 위해 여왕은 기독교를 했다.

스페인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기독교로 개종하거나 스페인을 떠나거나 하는 선택을 강요받았다. 결국, 많은 유대인들이 오랜 세월동안 조상 대대로 태어나고 자란 자신들의 고국 스페인을 떠나는 선택으로 머나먼 항해를 시작한 반면, 스페인에 남아서 카톨릭으로 개종한 스페인 유대인들도 적지 않았다. 유대인들이 떠난지 십년이 채 되기 전, 무슬림 또한 개종을 하거나 강제 추방을 당하거나 하는 어려운 선택을 해야만 했고, 그 과정에서 수 많은 무슬림들이 종교재판에 회부되었다. 이렇게 해서 스페인에서 종교재판이 시작되었다. 200년 이상 지속 되면서, 가장 잔인하고 무시무시한 고문과 처형 방법으로 악명 높았던 스페인 종교 재판은 약 32,000건의 사형을 집행하였다. 그리고, 16세기 초 스페인은 결국 단일 교회인 카톨릭으로 통일되었다.

그래도, 역사의 시간은 흐른다
끝이 없을 것 같았던 서 유럽의 잔인한 종교 재판의 불길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사그라들었다. 한편, 동방 제국은 이슬람에 의해 쇠퇴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1400년 경까지 그나마 남아 있던 콘스탄티노플도 1453 년 오스만제국의 메흐메트 2 세에 의해 완전히 점령 되었고, 그의 통치 아래서 기독교인들은 동 유럽에서 피지배인이 되었다.

동방 교회의 수도로써 ‘제 2의 로마’라고 불리던 콘스탄티노플은 이제 더 이상 기독교 전통의 하나의 핵심이 될 수 없었으며, 동시에 인간드라마의 역사는 새로운 시대로 들어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콜럼버스는 신대륙을 찾아 최초로 대서양을 건너 동쪽 아메리카로 향하고 있었고, 예술가, 학자, 과학자 같은 많은 지식인들이 인간 역사를 중세에서 근대로의 전환하고 있었다. 르네상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문화운동 시대가 시작되었다.
기독교의 역사를 보니 로마 카톨릭의 권력이 얼마나 막강한지 다시금 알게 되었습니다.
개신교에서 지키고 있는 크리스마스와 일요일 예배 등도 로마 카톨릭에서 정한 건데…
믿음의 개혁을 외치며 종교 개혁을 일으켜도 완전한 초대교회 진리는 회복하지 못한 모습이네요.
하나님의 교회는 유일하게 예수님께서 본 보이신 초대교회 진리를 지키고 있습니다.